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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

2013. 8.

by 린킨박 2022. 11. 4.

6.

방학이란, 시작하면 '뭘 해야 좋을까'하고 행복한(?) 상상만하다가,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없이 끝나버리는 그런 것이었다.
또한 몇 번을 반복하면서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적어도 이전까지는 시작하기 전의 어떤 의지라도 있었건만, 이제 그런 불가능한 의지마저도 지레 체념해버리는 단계에까지 이른 듯하다.
 
학교를 너무 오래 다닌건가보다.
하지만 이 또한 회사원들에게는 맞아죽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22.
간만에 탄 한국택시 안에서 본 서울-동네 풍경이 생경하고, 자꾸만 급히 끼어드는 차들에 '이래도 되나' 싶고, 경기도 벽지라고 아무말도 없다 마지막에 3000원 더 받는 택시기사에 슬며시 짜증도 나고.
그런데, 그러면서도, 묘하게도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왔구나..
 
 
 
28.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체리 블라썸>을 뒤늦게 보았다. 
아내의 진혼제의를 부토-후지산-사쿠라로 이어지는 일본(동양) 표상을 통해 실현하는 이 유럽산 영화에 일말의 반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반감이 영화의 핵심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의)특징 중 하나는 '죽음의 추방'이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의 삶과 철저하게 분리된다. 
 
아마 거기서부터 '죽음에 가까운 삶', 그러니까 노년, 혹은 노동으로부터의 유리된 삶(사회적 죽음)의 문제가 도출되는 것일테다. 언젠가, 또 언제든 그렇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대면하지 않으려는 허공에 걸린 삶에 대하여. 
 
<아무르>, <씨 인사이드>를 포함한 이 '죽음에 대한' 영화들은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듯 하다. 그것은 순식간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긴 과정일지도 모른다. (점점 그렇게 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닌 그 무엇으로 살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답게 살 권리가 개별자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죽을 권리도 삶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물음을 위해 그들은 떠나고, 결단하며, 실행한다. 정치에 의존하거나, 구속되지 않는 정치적인 죽음을 위해. 그것을 위해 이 유럽발 영화들은 죽음을 관조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러한 물음이 허여되었던 적이 있던가. 물음이 태어나기 전에, 죽여지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보다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지는 않았던가. 관조하기 전에 죽음은 집단적으로 처리되거나, 전시된 것은 아닌가.
 
죽음과 정치, 죽음의 정치, 정치의 죽음.
 
 
이따위 어지러운 잡설보다 명징한 물음과 답이 오늘 강연에 있겠지.
 
 
 
30.
군대에서 휴가나오면, 일하다 쉬는 느낌이라도 나건만, 이건 뭐 놀다와서 놀고만 있으니 마음이 심히 편치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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